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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장갑차에 의한 중학생 압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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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군 장갑차에 의한 중학생 압사 사건은 2002년 6월 13일, 경기도 양주시에서 미군 장갑차가 갓길을 걷던 신효순, 심미선 양을 덮쳐 사망한 사건이다. 사고 이후 미군은 운전병과 관제병을 기소했으나 군사 재판에서 무죄 평결을 받았고, 이는 전국적인 반미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건은 주한미군지위협정(SOFA)의 불평등성을 드러냈으며, 국민적 시위와 함께 SOFA 개정 요구로 이어졌다. 이후 미군은 사과하고 안전 조치를 강화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도로를 개선하고 SOFA를 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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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장갑차에 의한 중학생 압사 사건
사건 개요
양주 고속도로 사건 희생자: 심미선(왼쪽)과 신효순
양주 고속도로 사건 희생자: 심미선(왼쪽)과 신효순
사건 명칭미군 장갑차에 의한 중학생 압사 사건
발생 위치경기도 양주시
사건 상세
발생 일시2002년 6월 13일
희생자신효순
심미선
사고 종류교통 사고
가해자주한미군
관련 차량M88 구조전차
관련 정보
다른 이름양주 고속도로 사건 (Yangju highway incident)
양주 훈련 사고 (Yangju training accident)
56번 국도 사고 (Highway 56 Accident)

2. 사건 발생과 진행

2002년 6월 13일,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있던 날이자 신효순 양의 생일 전날이었다. 신효순, 심미선 양(당시 14세)은 친구 집에 가기 위해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56번 지방도를 걷고 있었다. 이 도로는 편도 1차로의 좁은 도로였고, 갓길도 제대로 마련되지 않아 평소 주민들이 갓길을 통행로로 이용했다.[16]

같은 날 오전 10시 30분 경, 주한 미군 미 보병 2사단 44 공병대대 소속 부교 운반용 장갑차가 법원리 쪽에서 오르막길로 올라오고 있었다. 미군 장갑차 행렬은 선두 안내차량 1대, 병력 수송 장갑차, 사고차량, 일반 공병궤도 차량 3대, 후미 안내차량 1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때 맞은편에서 M2/M3 브래들리 기갑 전투차량 5대가 덕도리에서 무건리 훈련장으로 오고 있었다.

사고 도로는 폭이 3.3m 정도였지만, 사고 차량의 폭은 3.65m였다. 미군 장갑차는 도로 폭보다 넓은 상황에서 마주 오던 차량과 교행을 시도하다가 갓길을 걷던 두 여학생을 덮친 것으로 알려졌다.[16] 유족들은 "당시 사고 차량의 너비가 도로 폭보다 넓은 데다 마주 오던 차량과 무리하게 교행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이번 사고는 이미 예견된 살인행위였다"라고 주장했다.

사고 직후, 미군 당국은 미8군 사령관의 유감 표명을 전하고, 다음 날인 6월 14일에는 미 보병 2사단 참모장 등이 분향소를 방문해 문상하고, 유가족에게 각각 1000000KRW을 전달했다.[16] 미군 측은 6월 15일 장례식을 치르면 사단장과 면담을 약속했지만, 장례 후 번역상의 실수를 이유로 약속을 파기하여 유족과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3. 이후의 처리 과정

미군 당국은 2002년 7월 3일 운전병 마크 워커 상병과 관제병 페르난도 니뇨 상병을 과실치사죄 혐의로 미 군사법원에 기소하고, 라포트 주한 미군 사령관의 사과를 전했다.[4] 대한민국 검찰도 자체 조사를 벌였으며, 유족들은 6월 28일 미군 책임자들을 고소하며 미측의 재판권 포기를 요청했다. 법무부7월 10일 사상 처음으로 미측에 재판권 포기 요청서를 보냈으나,[5] 8월 7일 미군 당국은 “공무 중에 일어난 사고이기에 재판권이 미국에 있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11월 18일부터 11월 23일까지 캠프 케이시 내 미 군사법정에서 열린 군사재판에서 배심원단은 기소된 미군 2명에게 모두 무죄 평결을 내렸다.[7] 이는 공무 중 과실사고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후 미군은 11월 27일 사죄 성명을 발표했다.

한편, 반미 시위가 격화되면서 미국 고위 관리들의 사죄와 조지 워커 부시 대통령의 유감 표명이 이어졌다.

3. 1. 미군 측 조사 결과 및 문제점

6월 19일 미군 측은 한미 합동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고의가 아닌 우발적인 사고였다고 강조했다. 미군 측은 사고 원인으로 회수차량 구조상 우측에 사각지대가 있어 조종수가 학생들을 발견하지 못했고, 통신 장애도 있었다고 밝혔다. 관제관이 약 30m 앞에서 학생들을 발견하고 조종수에게 경고하려 했으나, 소음이나 다른 무선 교신 등으로 인해 불가능했다고 보고했다. 또한 회수차량은 저속으로 직진하고 있었으며, 급격한 방향 전환이 사고 원인이라는 유족들의 주장을 부인했다.[2]

하지만 유족들은 이러한 발표에 의문을 제기했다. 사각지대나 통신 장애 발생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었다. 또한, 저속 주행이었다면 학생을 친 순간 즉시 제동 장치가 작동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학생의 두개골이 완전히 파괴되어 모순된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도로 아스팔트 포장의 균열은 회수차량이 직진했다는 미군 측 발표와 모순된다고 비판했다.[2]

이후, 조사 당시 제시된 주행 속도의 절반 값으로 발표했던 사실이 밝혀졌다. 6월 28일에는 미8군 홍보 담당자가 라디오를 통해 "누구도 책임을 져야 할 과실이 없었다"고 발언했으나, 이는 여론의 비판을 더욱 확대시켰다.[2]

4. 법적 문제와 논란

주한미군지위협정(SOFA)에 따르면, 공무 중인 미군 병사의 범죄는 미군 법원의 관할이다. 한국 법무부는 재판권 이관을 요청했으나, 미군 측은 공무 중 사고를 이유로 거부했다.[5] 미 군사법원의 무죄 판결은 한국 사회의 반미 감정을 증폭시켰다.

2002년 7월 5일, 운전병 마크 워커 상병과 지휘관 페르난도 니뇨 상병은 미군 군사사법규정(UCMJ)에 따라 “과실치사” 혐의를 받았다.[4] 7월 10일, 한국 법무부는 미군 사령부에 사건 관할권을 한국 사법 체계로 이관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주한미군 법무관 켄트 마이어스 대령은 미군 병사에 대한 민간 소송 허용 선례를 우려하여 거부했다. 그는 미군이 관할권을 포기한 경우는 의도적이지 않은 우발적 행위였던 단 한 번뿐이라고 지적했다.[5]

미군 당국은 한국 법무부 요청을 거부했지만, 언론 관계자 30명 이상, 한국 법무부 및 외교통상부 관계자, 기타 한국 비정부기구(NGO) 관계자들을 재판 참관에 초청했다. 피해자 유족도 초청하여 별도 방을 제공했다.[6]

재판 과정에서 니뇨 변호인은 그가 두 소녀에게 경고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워커가 통신 장치 결함으로 명령을 듣지 못했는지, 무전기 주파수를 변경했는지에 대한 보고는 엇갈렸다.

2002년 11월, 니뇨와 워커는 “과실치사”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7] 한국 법무부는 판결에 불만을 표하면서도 사용된 절차는 존중한다고 밝혔다.[7]

5. 국민적 반향과 시위

2002년 FIFA 월드컵 이후 사건이 널리 알려지면서 미군을 규탄하는 여론이 확산되었고, 전국적으로 대규모 촛불 시위가 전개되었다. 특히 미군 무죄 판결 이후인 11월 26일부터 전국적인 집회가 열렸는데, 이는 사건 직후 6월의 운동 이후 최대 규모였다.[7] 종교계, 시민단체, 일반 시민 등 각계각층이 참여한 시위는 주한미군 범죄와 불평등한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로 이어졌다.

12월 6일 서울 집회에는 3만여 명이 참가하여 경찰을 따돌리고 미국대사관 진입을 시도했다.[15] 12월 14일 부산 집회에서는 부산 주한미군기지(Camp Hialeah) 후문이 시위대에 의해 돌파되었고, 정문에서도 경찰을 돌파했다.[15] 이 외에도 전국 각지 및 해외에서도 주한미군 규탄 집회가 열렸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2003년 추모식에서 미국의 태도를 비판했다.[15]

이러한 운동 확산에 위기를 느낀 미국 정부는 11월 27일 주한 미국대사를 통해 부시 대통령의 사과를 전달했고, 12월 13일 부시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과 통화하며 다시 한번 유감을 표명했다.[15] 또한 불평등하다는 비판을 받아온 SOFA 개정에도 합의했으나, 국민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15]

5. 1. 추모와 상징

2002년 FIFA 월드컵 이후 이 사건이 널리 알려지면서 추모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당시 한국 국민 사이에 널리 사용되던 MSN 메신저를 통해 희생자를 추모하는 의미로 "▶◀", "▷◁"와 같은 기호가 퍼졌다. 이 기호들은 닉네임이나 온라인 게시판 제목에 많이 사용되었으며, 이후 인터넷에서 추모 또는 애도의 뜻을 표하는 기호로 널리 사용되었다. (한국에서는 상례 시 이러한 리본 형태의 조장을 다는 전통이 있다.)[15]

6. 정치/사회적 영향 및 결과

이 사건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안전 불감증과 불평등한 한미 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건 직후 미국 민간 및 군 관계자들은 즉각 사과하고 유족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했으며,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김대중 당시 대통령에게 전화하여 유감을 표명했다.[8]

두 미군 병사의 무죄 판결은 한국 내에서 대규모 반미 시위를 촉발했다. 2002년 12월 당시 미국 국무부 차관보였던 리처드 아미티지는 이를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에서 일어난 가장 큰 반미 시위"라고 표현했다.[9] 이 사건은 주한미군에 대한 통제권 강화와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개정 요구로 이어졌으며, 천주교 사제 문정현 신부는 서울 주미대사관 앞에서 단식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10]

2002년 12월 둘째 주 서울에서는 5만 명 이상이 참가하는 집회가 열렸고, 미군 시설에 대한 공격도 발생했다. 한 사건에서는 무장하지 않은 미 육군 중령이 칼을 든 한국 남성들에게 공격받아 경상을 입기도 했다.[11] 2017년 6월에는 여러 K팝 스타들이 의정부 주둔 미군 캠프 행사에서 이 사건 15주년 시위를 언급하며 공연을 보이콧하거나 중간에 퇴장하기도 했다.[12]

사건 이후 미국 군부와 대한민국 정부는 사고 재발 방지를 위한 조치를 취했다. 미국 육군은 사고 관련 장갑차의 민간 도로 운행을 금지하고, 훈련 안전 개선을 위한 20가지 이상의 추가 조치를 발표했다. 경기도 관계자들은 사고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 도로 인프라 개선을 위해 9400만달러 규모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 프로젝트는 제2보병사단이 사용하는 도로를 넓히고 직선화하며 보행자 통행로를 추가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며, 2004년 4월에 완료되었다.[13]

2002년 FIFA 월드컵 이후 이 사건이 널리 알려지면서 미군을 규탄하는 여론이 확산되었고, 많은 시민단체가 데모 행진을 펼쳤다. 11월 20일과 22일에 두 미군에게 무죄 판결이 내려지자, 11월 26일 첫 집회가 열렸다. 이는 사건 직후 6월의 운동 이후 최대 규모였다. 또한 전국 주요 도시에서 시민단체들이 모여 활동 방향을 논의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도 2003년 거행한 추모식에서 미국의 태도를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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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인터넷에서도 확산되어 주한미군을 비난하는 여론을 형성하고 대규모 집회로 이어졌다. 당시 한국 국민 사이에 널리 사용되던 MSN 메신저를 통해 희생자를 추모하는 의미로 "▶◀」「▷◁」라는 기호가 퍼져 닉네임이나 온라인 게시판 제목에 많이 사용되었다.

전국적인 시위는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의 쇼트트랙 판정 등 여러 요소가 더해져 더욱 확대되었다. 12월 6일 서울에서 열린 집회에서는 3만여 명이 참가하여 미국대사관 진입에 성공했고, 12월 14일 부산에서 열린 집회에서는 부산 주한미군기지(Camp Hialeah) 후문이 시위대에 의해 돌파되었다.

미국 정부는 11월 27일 주한 미국대사를 통해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사과를 전달했고, 12월 13일에도 부시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다시 한번 유감을 표명했다. 또한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개정에도 합의했다.

미국 정부는 당시 지휘관 등 4명을 징계했고, 유족들은 국가배상을 청구하여 각각 1.9억 정도의 배상금을 받았다.

북한은 2003년 평양 모란봉 제1중학교에서 두 학생을 명예 학생으로 추대하며 반미 선전에 활용했다.[15]

7. 경과

2002년 6월 13일,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있던 날, 효촌초등학교를 졸업한 동창 사이인 신효순, 심미선 양(당시 14세)은 친구 집에 모여 의정부에 놀러 가기로 했다. 두 여학생은 지방도를 따라 걷고 있었는데, 이 도로는 폭이 3.3m로 좁고 인도도 없어 평소 주민들이 갓길을 이용해 통행했다.

같은 날 오전 10시 30분 경, 주한 미군 미 보병 2사단 44 공병대대 소속 부교 운반용 장갑차가 여학생들 뒤쪽에서 오고 있었다. 사고 차량의 폭은 3.65m로 도로 폭보다 넓었고, 마주 오던 M2/M3 브래들리 기갑 전투차량 5대와 교행을 시도하던 중 갓길을 걷던 학생들을 덮쳐 사망에 이르게 했다.[16]

발생 일자사건 내용
2002년 6월 13일신효순, 심미선 양, 주한 미군 미 보병 2사단의 M88 장갑차에 깔려 사망.[2][3]
2002년 6월 14일미 보병 2사단 참모장 등이 분향소를 방문, 문상하고 피해 유가족에게 각각 100만을 전달.[16]
2002년 6월 28일유족, 미군 책임자 고소 및 재판권 포기 요청.[16]
2002년 7월 3일미군, 장갑차 운전병과 관제병을 과실치사 혐의로 미 군사법원에 기소.[16]
2002년 7월 10일대한민국 법무부, 미국 측에 재판권 포기 요청서를 보냄.[16]
2002년 8월 7일미군, 재판권 포기 거부.[5]
2002년 11월 18일 ~ 11월 23일미 군사재판, 미군 2명 무죄 평결.[7]
2012년 5월이명박 정부,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 합의. 범죄 피의자인 미군 관계자의 신병을 기소 전에 한국 당국에 인도할 수 있도록 협정 운용 개정.[18]


참조

[1] 뉴스 South Korea Weekly http://www.globalsec[...]
[2] 뉴스 Road Accident Galvanizes the Country: Deaths in Korea Ignite Anti-American Passion http://www.iht.com/a[...] International Herald Tribune 2002-07-31
[3] 뉴스 American Policies and Presence Under Fire in South Korea https://www.nytimes.[...] New York Times 2002-12-08
[4] 뉴스 US Soldiers Charged for Korean Deaths http://news.bbc.co.u[...] BBC News: World Edition 2002-07-05
[5] 뉴스 US Refuses Korean Justice for Soldiers http://news.bbc.co.u[...] BBC News: World Edition 2002-08-07
[6] 뉴스 US Leaders Emphasize Openness http://seoul.usembas[...] US Embassy Seoul 2002-11-19
[7] 뉴스 Korean Anger as US Soldiers Cleared http://news.bbc.co.u[...] BBC News: World Edition 2002-11-22
[8] 뉴스 US Official Met by Korean Anger http://news.bbc.co.u[...] BBC News: World Edition 2002-12-10
[9] 뉴스 US Official Met by Korean Anger http://news.bbc.co.u[...] BBC News: World Edition 2002-12-10
[10] 웹사이트 1980s 'Reds' evolving into a broader-based anti-U.S. pressure bloc http://koreajoongang[...] Korea JoongAng Daily 2002-12-06
[11] 뉴스 US Soldier Attacked in South Korea http://news.bbc.co.u[...] BBC News: World Edition 2002-12-16
[12] 뉴스 K-pop singers boycott concert for US soldiers over past tragedy https://www.koreatim[...] The Korea Times 2017-06-26
[13] 뉴스 South Korea Widening Project to Help Prevent Repeat of 2002 Accident https://www.stripes.[...] Stars And Stripes 2004-02-08
[14] 웹사이트 北の中学校が「女子中生死亡事件」で反米教育 https://www.chosunon[...] Chosun Ilbo 2004-07-06
[15] 웹사이트 北の中学校が「女子中生死亡事件」で反米教育 https://www.chosunon[...] 조선일보 2004-07-06
[16] 뉴스 생일파티길 두 중학생 궤도차량에 참변 전말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02-07-18
[17] 뉴스 “막내딸 미선, 가슴에 묻은지 10년… 반미단체 정치적 추모행사 불참”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12-06-04
[18] 뉴스 “미•한 SOFA 개정…‘기소 전 신병인도’ 가능해져” http://www.47news.jp[...] 교도통신 2012-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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